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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화 감상究/전쟁역사 그리고...

터키 군부는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가! 그리고 왜 실패했나?

by 하승범 2016. 7. 17.

[ 터키 국민들이 쿠데타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스탄불 탁심 광장을 지키는 정부군 ]

2016년 7월 15일 오후, 일부 터키 군부에 의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Recep Tayyip Erdoğan, 1954년 2월 ~ ) 터키 대통령에 반발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발생 6시간여만에 진압되었다[각주:1]

이번 쿠데타의 실패 요인은 터키 국민들이 직접 쿠데타 군에 맞서고 군부 퇴출을 외치는 야간 시위를 벌이는 등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다.[각주:2] 

한편 쿠데타 세력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퇴행적 독재 통치에 불만을 갖고 "법이 국가를 지배할 수 있도록 헌법 질서, 민주주의, 인권, 자유를 다시 세울 것"을 선포하였다. 즉 에르도안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언론을 탄압하고 자신의 권위주의적 동맹세력을 확대했으며 이슬람 근본주의 통치를 강화하고 있다고 반발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패망한 이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 (Mustafa Kemal Atatürk, 1881년 5월 ~ 1938년 11월)은 그리스,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 연합군과 독립전쟁 (Türk İstiklâl Harbi, 1919년 5월 ~ 1923년 7월)을 통해 터키 공화국을 세웠다 (1923년 10월 29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 (Mustafa Kemal Atatürk)은 터키 공화국 선포 이후 대통령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한다. 특히 그는 남녀평등과 공업화를 통한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오랜 전통인 이슬람 칼리프제(칼리파(khalīfa) 를 폐지하고 근대적이고 평등한 세속주의(Secularism,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헌법으로 채택한다

터키 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종교와 국가간의 관계를 정의한 세속주의를 통해 민주 공화국이며 그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다. "종교와 종파 등으로 차별받지 않으며 법 앞에 평등하다"(헌번 10조)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주창한 케말리즘(Kemalizm)의 6대원칙인 공화주의(Cumhuriyetçilik), 민족주의(Milliyetçilik), 인민주의(Halkçılık), 국가주의(Devletçilik), 세속주의(Laiklik), 혁명주의(İnkılapçılık)를 통해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와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흡수한다.

그러나 근대적이고 평등한 조치였던 '세속주의'는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지는 요인이기도 했다. 즉 세속주의(Secularism)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계층은 자본가들과 교육수준이 높은 도시사람들이었고 이로 인한 양극화와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이런 차별 속에서 소외된 계층은 세속주의(Secularism)보다 '이슬람주의'에 이끌리게 되었다. 결국 이슬람주의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높아지면서 선거에서 정교 분리 원칙을 지지하는 세속주의 정당을 누르고 이슬람주의 정당에 집권하게 된다. 

현재 터키 12대 대통령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Recep Tayyip Erdoğan) 대통령은 이슬람교의 영향력을 정책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는 사회보수주의 정당 '정의개발당 (AKP, Adalet ve Kalkınma Partisi)' 당수이다. 그는 경제 성장 등을 통해 전국에 걸쳐 국민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으나 정교 분리 원칙을 지지하는 세속주의 세력들인 군부와 사법부[각주:3] 등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그동안 터키 세속주의(Secularism)를 신봉하는 군부는 이슬람주의 정권이 생기거나 세속주의가 약해질 때마다 쿠데타를 통해 정치에 개입하였다. 그들은 쿠데타 이후에는 빠르게 정권을 세속주의 정당을 중심으로 하는 민정에 이양을 했다. 

하지만 터키 군부의 든든한 버팀목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터키 세속주의 정당에 대한 민심은 좋아지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터키 사회는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는 세속주의를 따르고 윤리적으로는 이슬람 정신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가 이끄는 사회보수주의 정당 '정의개발당 (Adalet ve Kalkınma Partisi)'은 이러한 변화을 수용하면서 군부의 영향력을 줄여나가고 이를 통해 쿠데타 명분를 빼앗았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장기집권과 독재 그리고 비리에도 불구하고 터키 경제를 성장시키고 이슬람주의를 표방하면서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 투항한 쿠데타에 참여했던 군인들을 구타하는 터키 국민들 ]

터키의 군사 쿠데타[각주:4] 역사 :
#1 1960년 5월 2일 카말 귀르셀 주도, 이슬람 영향력이 정계에 광범위하게 퍼지는 것에 대한 군부의 반발
#2 1971년 이슬람 세력으로 인해 극심한 좌우 분열이 발생했다고 판단한 군부의 반발
#3 1980년 9월 12일 (케난 에브렌 Ahmet Kenan Evren 참모총장), 세속주의와 이슬람주의 간 충돌에 대한 반발
#4 1997년 이슬람 성향의 집권여당 '종교복지당 (Religious Welfare Party)'을 폐당하기 위한 조치
#5 2002년 친 이슬람 정부출범을 막고자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 (2010년 대규모 군부 축출 빌미제공)

# '가능성 2.5%가 현실로'…터키 쿠데타에 전문가들 어리둥절 - 연합뉴스 2016-07-18

이런 상황에서 2016년 7월 15일 터키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터키 국민의 독재 정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에르도안 대통령과 군부와의 오랜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기존 쿠데타와 달리 군부 지도층의 전체적인 합의가 아닌 일부 군인들에 의해 기획된 반란이었다. 또한 문제는 군부가 지원하는 터키 세속주의 정당도 부패하고 무능하여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미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가 사회지도층부터 일반 국민까지 든든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

터키 내부의 정치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우선 세속주의(Secularism)를 통해 성장한 엘리트 집단과 그런 성장에 소외되었던 다수의 무슬림과의 갈등이 있고, 한편으로는 오랜 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지만 에르도안 대통령 집권 이후 힘을 읽은 군부, 사법부와 이슬람주의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있으며, 또 다른 측면에서 에르도안 대통령 장기 독재에 대한 불만과 반발 등 여러 요인이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터키 쿠데타 이후 터키의 정치적 혼란은 오래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과연 이슬람 가치를 정치 중심으로 하며 서구적 민주주의를 병행하는 '이슬람식 민주주의'는 성공할 것인가! () 2016-07-17


"아침 이슬을 꿀벌이 마시면 꿀이 되지만, 뱀이 삼키면 독이 된다” 
터키 종교사상가 '베디우즈자만 사이드 누르시 (Bediüz-zaman Said Nursi, 1876년~1960년)'


터키 쿠데타는 ‘자작극’이다?!  이번 쿠데타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정권 연장을 위해 벌인 자작극이란 음모론 확산

[ 쿠데타군의 진격을 맨몸으로 저지하는 터키 국민들 ] 

현대의 서구적 가치에 대해 반드시 국민 모두가 선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필요하다. 역시 정치는 합리나 논리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먹고 사는 경제가 함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 경제를 성장시키고, 성장의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간다면 
2. 대중 다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반적인 관습이나 문화를 보호할 수 있다면 
3. 민주주의나 인권과 같은 서구적 가치에 대한 다소의 제한이 있더라도 
4. 대중은 그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진정한(?) '정치'가 되는 것일까! 이것이 70년대 주장되었던 '한국형 민주주의'가 아닌가! 어떻게 생각하세요?


  1. 터키군 (Türk Silahlı Kuvvetleri (TSK))은 약 65만여명의 상비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비군 약 300백만명) [본문으로]
  2. 터키 국민은 "최악의 민주주의가 최상의 쿠데타보다 낫다"는 입장에서 군부 쿠데타에 반대 의사를 갖고 있다. [본문으로]
  3. 쿠데타 실해 이후 최고법원판사 수백명이 체포되었다. 많은 판사들이 에르도안 대통령의 최대 정적인 이슬람 학자 페툴라 귤렌 동조자가 많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이다. [본문으로]
  4. 헌법 제13조 2항에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2010년 국민투표에 의해 이 조항이 폐기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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