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트니크 (체크닉, Chetnic)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내의 독일군과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에 대항하여 결성된 세르비아계 게릴라부대(Serbian nationalist guerrilla force)이다.
체트니크는 상중(喪中)에는 수염을 깍지 않는 세르비아 남자들의 전통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부활할 때까지는 상중으로 간주한다고 수염과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이들의 이념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반공주의, 반크로아티아주의로 무장하고 하고 있었다.
처음 보스니아에서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다양한 조직이 구성된 체트니크 중에서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제2군 부참모장이며 전 육군대령 출신 미하일로비치(Dragoljub Mihajlovic, 1893–1946)가 지휘하는 조직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1941년 5월 영국 런던의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는 체트니크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미하일로비치를 '유고 국내주둔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독일군과의 대규모 전투를 피하면서 연합군에 의해 유고슬라비아가 해방되고 왕정이 복귀되기를 기다렸다. 더구나 이들은 규모에 비하여 명령체계가 불분명하고 기강이 해이해서 각 지역사령관에 의해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민병대 수준이였다
파르티잔(Partizan/Partisan, 빨치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내의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와 그의 공산당원(Communist Party)들의 지휘하에 결성된 게릴라부대이다. 파르티잔(Partizan/Partisan)은 나폴레옹 침공시 스페인에서 프랑스군에 대항해서 싸운 게릴라 조직 파르타다스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군에 징집되었다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된 후 '공산주의자'가 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귀국 후 활발한 공산당활동을 하다가 1939년 유고 공산당 서기장이 된다. 독일의 전쟁활동을 '제국주의전쟁'으로 규정한 소련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침묵하던 티토는 독일의 소련침공에 따라 1941년 6월 무장조직인 파르티잔을 편성하여 독일군에 저항한다.
세르비아지역에서 독일군에 저항하던 체트니크(Chetnic)과 파르티잔(Partisan)는 1941년 9월부터 연합작전을 수행한다. 그러나 슬라브민족(세르비아인)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독일군의 참혹한 보복 학살에 대한 우려와 영국과 유고망명정부의 지원으로 자급 무장력이 강화로 미하일로비치는 파르티잔과의 협력을 거부한다. 더구나 왕당파인 체트니크의 입장에서 공산당인 파르티잔을 잠재적인 위협요소로 보고 서로 물리적인 충돌을 하게 된다.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의 유혈사태는 독일군의 대대적인 저항세력에 대한 토벌작전과 영국의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중단으로 '체트니크'의 붕괴를 가져온다. 1941년 11월 미하일로비치의 잠적과 더불어 대부분의 체트니크가 해산한다. 그러나 일부 체트니크는 독일군에 의해 조직된 괴뢰군인 '세르비아 보안군'에 가담한다. 이렇게 체트니크 조직은 빠르게 현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과 함께 파르티잔을 소탕하는 토벌대로 변하였다.
한편 독일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최정예병력 6,000여명과 함께 험준한 몬테네그로 산악지대로 일단 은신한 티토의 파르티잔은 1942년 6월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비하치'로 400Km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이 대장정과정에서 독일군의 학살과 우스타샤의 잔혹함에 복수를 결심한 사람들이 파르티잔에 참여하며 5개월만에 15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사집단으로 성장하였다.
1943년 1월 20일 독일점령군은 파르티잔에 대한 대규모 토벌을 위한 '바이스' 작전(1943년 1월 20일~3월)을 벌인다. 이 작전에는 이탈리아군과 더불어 12,000여명의 체트니크병력이 포함된 9만여명의 무장병력이 동원되었다. 이 전투에서 파르티잔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체트니크 병력은 무장 해제되고 붕괴되었다. <네레트바 전투 참조>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영국과 미국으로 부터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면서 1943년 3월 부터는 연합군으로 부터 무기와 탄약, 의약품 등의 보급물자를 지원받게 되고 부상병들을 이탈리아의 연합군 야전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성장한 파르티잔을 토벌하기 위해 독일군은 14개 사단을 투입하지만 쉽지 않은 무장세력으로써의 파르티잔의 저항을 받게 된다.
반대로 체트니크는 연합군으로 부터 지원되던 빈약한 보급도 1944년 2월 부터 중단되어 그해 여름 완전하게 붕괴되어 독일군에 협력한 배신자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티토의 파르티잔은 소련이 지원한 1개 기갑군단과 더불어 1944년 10월 20일 수도 베오그라드를 점령하고 이후 1945년 5월까지 80만명으로 늘어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군은 독일군과 전투를 벌이며 유로슬라비아를 직접 해방하였다. 2007-06-24
체트니크(Cetnic)가 등장하는 전쟁영화 ;
# 나바론 요새 2 (Force 10 From Navarone) 1978년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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