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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속 오늘] 1981년 6월 7일, 2분의 기습, 40년의 파장 ... 이스라엘 '오페라 작전'이 바꾼 중동 핵 지형

전쟁영화 감상究/전쟁역사 그리고...

by 하승범 2026. 6. 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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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6월 7일, 이스라엘 F-16 8대가 왕복 3,200㎞ 장거리 비행 끝에 이라크 오시라크 원자로를 단 2분 만에 초토화했다. 16발의 폭탄 중 14발이 돔에 명중했고, 전투기는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귀환했다.

 

중동의 핵 지형을 단숨에 뒤바꾼 이 공습은 이후 40년간 이스라엘 안보 교리의 근간이 됐다.

사담 후세인은 왜 원자로가 필요했나

1970년대 후반, 중동 정세는 이중의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이라크는 프랑스와 계약을 맺어 출력 40MW급 연구용 원자로를 바그다드 동남쪽 17㎞ 지점에 건설했다. 농도 93%의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이 원자로 연료로 사용될 계획이었으며, 프랑스는 기술 인력 교육까지 담당하기로 했다.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은 산유국으로 에너지 자원에 불안이 없는 이라크가 핵 개발을 이유로 장래의 석유 자원 고갈을 대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해명을 납득하는 나라는 많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1차 공습 이후 "이 원자로는 이란이 아닌 시온주의 적을 겨냥한 것"이라고 공개 발언했다. 이스라엘로서는 의심을 확신으로 굳히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이스라엘은 사담 후세인의 대이스라엘 적개심과 공격적인 발언들을 근거로 이라크의 평화적 핵 이용 주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모사드는 먼저 움직였다 ... 폭격 이전의 비밀전쟁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군사 타격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중엽 이츠하크 라빈 정부는 이라크 핵 프로그램에 대항한 비밀 외교 작전을 개시했다. 외교적 압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모사드는 직접 행동에 나섰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프랑스 현지의 원자로 부품 공급 공장을 사보타주하고, 이라크 핵 프로그램의 핵심 이집트인 과학자를 파리에서 암살하는 등 다각적인 방해 공작을 전개했다. 그러나 오시라크 원자로의 완공 일정은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는 오시라크 원자로가 핵무기용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없도록 연료를 사전에 처리하는 등 비밀 예방조치를 취해왔고, 공식적으로도 "원자로의 유일한 목적은 과학 연구이며 군사적 이용은 배제되었다"고 강조했다.

 

이스라엘 수뇌부는 이 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핵연료가 장입되어 원자로가 가동에 들어가는 순간, 폭격은 곧 방사성 낙진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타격 시점은 가동 직전, 단 하나의 선택지만 남아 있었다.

요르단 국왕의 목격, 사우디 레이더의 허점 ... 1,600㎞를 뚫은 비행의 전말

타바 국제공항에서 출격한 8대의 F-16A 전투기가 공격기로, 6대의 F-15A가 요격기로 F-16을 공중에서 에스코트하는 역할을 맡았다. 타바 국제공항에서 오시라크 원전까지의 거리는 약 1,600㎞였다. 

 

편대는 적의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영공을 무허가로 통과하며 사막 상공 30m라는 극단적인 초저공 비행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연달아 발생했다.

 

사막 휴양지에서 요트를 즐기던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이스라엘 전투기 편대를 육안으로 포착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라크 공습을 예상하고 바그다드에 긴급 경고를 발신했다. 그러나 소통 오류로 인해 이라크 군부에는 끝내 이 정보가 닿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영공에서는 레이더에 포착되는 위기가 찾아왔다.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완벽한 아랍어 액센트로 자신들을 "항로를 이탈한 요르단 공군 훈련기"라고 칭하며 위기를 넘겼다.

 

작전 당일은 서방에서 휴일인 일요일로, 혹시나 있을 프랑스인 관계자들의 사망 가능성을 낮춰 국제적 비난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2분, 단 2분 ... 수십 년 핵 개발의 종말

현지 시각 18시 35분, 오시라크 원전에서 20㎞ 떨어진 지점에서 F-16 편대는 고도 2,100m로 상승한 뒤 35도 각도에 시속 1,100㎞의 속도로 급강하하면서 접근했다. 

 

저녁 식사 시간과 맞물려 이라크 방공 요원들의 경계 태세가 느슨해진 틈이었다.

 

1,100m 거리에서 8대의 F-16은 마크 84 폭탄을 2발씩 5초 간격으로 모두 16발을 투하했다. 총 16발 중 14발이 원자로 돔에 직격했다. 실제 공습 과정에서 소요된 시간은 채 2분도 안 됐다. 

 

이라크군 10명이 전사했고 프랑스인 민간인 기술자 1명도 사망했다. 이스라엘은 아무런 인명피해를 내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수년에 걸쳐 추진된 이라크의 핵무기 개발 핵심 시설을 단 2분 만에 무력화한 순간이었다.

베긴의 선언 ...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늦는다"

공습 이틀 뒤 텔아비브에서 열린 긴급 기자회견.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는 작전의 전 책임을 자신이 진다고 밝히며 두 가지 논거로 공습을 정당화했다.

 

베긴은 이 타격을 "최선의 예견적 자위권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다음 말로 마무리했다. "더 나중은 어쩌면 영원히 너무 늦으니, 우리는 더 나중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선택합니다." 

 

베긴 총리는 공습 이후 "향후 어떤 적대국도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막는 선례"라고 천명하며 이 원자로 공습을 이스라엘 안보의 하나의 원칙으로 천명했다. 

 

이것이 이후 '베긴 독트린'으로 불리게 되는 이스라엘 안보 교리의 공식 선언이었다.

 

베긴 독트린은 가상 적국이 대량살상무기, 특히 핵무기를 보유할 능력에 대해 이스라엘 정부가 반확산 정책으로서 행하는 예방 타격에 대한 일반 원칙이다. 이 교설은 여전히 이스라엘 안보 계획의 근간으로 남아 있다. 

 

한편 이 폭격 작전은 이스라엘 국내에서 집권당 리쿠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3주 후 선거에서 베긴이 이끄는 리쿠드는 대승을 거뒀다.

국제사회의 비난, 그리고 역사의 역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81년 6월 19일 결의 제487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여 이스라엘이 이라크 내 IAEA 승인 핵시설을 공격한 것을 규탄했다. 

 

작전 직후 UN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작전이 국제법 위반이라고 강력히 규탄했다. 

 

미국도 공개적으로 비판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0년 뒤, 역사는 다른 판결을 내렸다.

 

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가 오시라크 원자로를 통해 핵 개발에 성공했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를 목격한 서방 정치인들은 사견을 바꿨다. 당시 미군을 지휘한 리처드 체니 국방장관은 이스라엘의 1981년 공습이 걸프전을 훨씬 더 수월하게 만들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오시라크 원자로의 폐허는 폭격 당시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걸프전에서 미국 공군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파괴됐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오페라 작전이 남긴 것 ...선제타격 교리의 원형

오페라 작전은 단순한 군사 성공담이 아니다. 이 작전은 냉전 이후 국제안보 질서에 세 가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첫째, 선제타격은 언제 정당화되는가.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핵 공격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 능력이 완성될 가능성을 근거로 공격했다. 국제법상 '예방 타격(preventive strike)'과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의 경계를 어디에 그을 것인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둘째, 핵 비확산 체제는 스스로 작동하는가. NPT(핵비확산조약) 체제는 이라크의 핵 개발을 막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물리적 공격이 막은 것이다. 국제기구의 규범과 실제 억지력 사이의 간극을 오페라 작전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셋째, 작전의 성공이 원인을 정당화하는가. 오페라 작전은 군사적으로 완벽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 전략적 판단의 정확성과 법적 정당성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오페라 작전은 제3차 중동전쟁(1967) 당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 원칙을 계승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일련의 정보 수집과 논의를 거쳐 메나헴 베긴 총리와 공군사령관 다비드 이브리의 지휘 아래 계획됐다. 

 

이 작전은 2007년 이스라엘의 시리아 원자로 공습(과수원 작전), 그리고 최근의 이란 핵 시설 관련 논쟁에 이르기까지 중동 분쟁의 원형(原型)으로 끊임없이 호출된다. 1981년 6월 7일의 2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6-06-05

스티븐의 전쟁영화보고評 하승범 대표

thewithatt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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